감각으로 무한히 진동하라  

                                                                                                                                           

                                                                                                                               문혜진

물질은 모든 것이 중단 없는 연속 속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서로 연대적인 수없는 진동으로 용해되는데, 이 진동들은 그만큼의 떨림들처럼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1)

 

명료하지 않고 모호하며 어슴프레함. 김인배의 작업 앞에 선 관객은 일종의 '번역 불가능성'과 맞닥뜨린 느낌을 받기 쉽다. 이 난감함은 작업이 상당한 정도의 내면적 밀도를 지닌 단단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배가되곤 한다. 스스로의 해독불능이 작업이 정리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혼돈이 아니라(이 경우 원인이 외부적이므로 보는 이에게는 책임이 없다), 소통 혹은 번역의 문제임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관습적인 상징계의 언어와는 다른 김인배의 비언어에 텍스트라는 수단으로 접속해보고자 하는 시도다. 본성상 의미를 고정시키고 한정짓는 글로 정형화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달아나는 김인배의 작업을 붙잡는 것은 실패를 내정한 일이며 모순일 테지만, 제한적이나마 그의 작업이 지닌 리듬에 공명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차원의 의미가 생성될 수 있으리라.  

 

1. 상태들이 공존하다. 

 김인배는 1회 개인전의 작가 노트에서 드로잉에서 조각으로 전환되는 작업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가끔 의지 없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들 중 하나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 위에 다시 그림처럼 색칠한다. 그런다고 그림이 되진 않는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에서 입체로, 다시 그림으로 전환되며 모종의 구조적 변화가 발생하고, 이것이 필연적이며 예측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초기 작업은 평면을 경유하여 최종적으로 입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평면과 입체의 전환 자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과 차원의 공존에 본질을 두고 있다. 

 차원 혹은 상태의 공존은 여러 층위에서 김인배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 중 하나다. 때로는 인간과 동물의 혼종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추상과 구상의 융합이라는 형태를 띠기도 하며, 환조와 부조의 결합, 선과 덩어리의 혼합, 벽과 바닥의 합체, 움직임과 정지의 중간 등 분화되는 양상은 다양하다. 초기작은 그 중에서도 조형예술로서 매체가 지니는 한정성을 탈피해보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는데, 드로잉과 조각의 구분을 무화시키려했던 1, 2회 개인전의 출품작들이 여기에 속한다. 소품인 <어디 앉아 계시는 겁니까>(2003)에서 벽에 붙어 있을 때는 부조이던 여성상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다리로 인해 3차원적 존재감을 획득한다. <상자>(2006)는 그림자의 환영과 재현의 환영을 결합한 작업으로, 얇은 나무판이 만드는 평행사변형 그림자는 드로잉으로 인해 직육면체의 윗면을 이루며 입체로 화하게 된다. 2차원과 3차원의 왕복 운동은 환조 작업에서 보다 본격화되는데, <수영 잘 하고 싶은 여자>(2004)가 대표적이다. 드로잉이 조각으로 변태 중이거나 조각이 드로잉으로 전환 중인 것처럼 보이는 이 진행 중(becoming)인 형상은 한 순간에만 통합된 이미지를 이룬다. 조각과 벽면에 그려진 손과 발은 특정한 시점에서 조상과 연결되어 재현의 환영을 완성하지만, 위치를 옮기면 곧 접속이 끊어져 개별적인 부분으로 돌아간다. 

 조형적 구조에 대한 김인배의 관심은 일관된 편이지만,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매체의 구조를 탐색해 각각의 특징을 명확히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구분을 없애는 쪽이다. 드로잉이 선을 더해서 입체의 환영을 만든다면, 소조는 점을 더해서 덩어리를 만든다. 두 매체의 차이는 '재현'이라는 공통 과제 앞에 '더하기'라는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는 속성상의 유사함 때문에 좁혀진다. 남은 것이라곤 환영과 실체, 2차원과 3차원의 차이 정도나 근본적인 비구분을 지향하는 김인배에게 이는 잠정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의식과 무의식, 현재와 과거, 물질과 정신은 도처에서 상호작용하고 상호침투하는 우주적 연속성의 한 양태라는 베르그손처럼, 김인배에게 차원이나 상태는 표면적으로 발현된 양상이 다를 뿐 심층에서는 서로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과 인간의 혼종을 표현한 <머스탱>(2006)과 <발레리노>(2004)는 야생말과 리젠트 컷 스타일의 남성, 백조와 발레리노의 외형적 결합이 아니라 둘 사이에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때 둘을 연결하는 접점은 형태라기보다 공통된 속성에 가까워보이는데, <머스탱>의 경우 길들여지지 않음과 과장된 남성성이, <발레리노>는 우아함과 단련된 근육의 긴장이 그것이다. 상태의 다중성은 보다 추상적인 차원에서도 동일하다. 측면의 몸과 후면의 두상을 혼합한 <지리디슨 밤비니>(2005)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상태의 공존이고, 성교 시 삽입 전후를 형상화한 <암기>(2009)는 시간차에 따른 서로 다른 두 상태의 결합을 구현한 것이다.  

 분류와 구분을 거부하는 성향은 매체의 조형적 영역을 넘어 사회제도적 차원에도 적용된다. 이른바 사회적 규범, 도덕적 가치, 합의된 체계 같은 것인데, 그 중 김인배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시간의 척도다. 시공간을 초월해 동일하게 적용되는 균등화된 시간은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인 시간조차 표준화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의 반영이다. <60시 12분 60초>(2007)는 분침을 시침으로, 초침을 분침으로, 시침을 초침으로 단순히 자리바꿈해 시간을 단번에 상대화시킨다. 제일 느린 시침이 가장 빨리 움직이는 이 변위된 시계는 시간을 축소시킨다. 시간이라는 척도를 비트는 것은 작가의 꾸준한 관심사로, 하나의 구 위에 단위를 달리하는 시간의 축들이 공존하거나(<조립되지 않은 시계>(2011)) 나선형의 진행 방향에서는 순차적이나 정면에서는 숫자들이 섞이는 탈선형적 시계가 그 결과다. 

 

2. 감각이 이동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과 글은 머리의 언어다. 이런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대응 관계로 물질을 관념화하고 고유의 문법 체계로 구조화를 수행한다. 김인배의 작업이 잘 번역되지 않는다면 논리와 이성이라는 머리의 언어를 따르지 않는 탓이다. 대신 그가 사용하는 것은 몸의 언어다. 김인배의 모든 작업은 몸으로 느끼는 감각에서 출발하며 그 감각을 조소의 물성으로 전환하여 현실화한다. 특정 자세일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떠올리며 모델링을 한다는 작가의 말은 피부로 체험하는 살의 감각이 작업의 근원임을 보여준다. 이는 살에 해당하는 덩어리를 주물러 형상을 빚어내는 조소의 매체 특수성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조각들은 힘의 작용에 따라 변화하는 근육의 모양이나 질감을 예민하게 포착해낸다. <수영 잘하고 싶은 여자>에서 중력과 팔을 뻗은 자세에 따라 양쪽이 다르게 처진 가슴 모양이나, <발레리노>에서 한껏 힘을 줘 곧추선 다리의 쭉 뻗은 모양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자세를 취한 듯한 생생함을 전달한다. 해당 자세를 취했을 때 느꼈던 피부의 감각이 형상의 촉각적 물성을 타고 올라와 관자에게도 환기되는 것이다. 일종의 상응에 해당하는 이 같은 체험은 만든 이의 감각기억과 보는 이의 그것이 작업을 통해 공명하는 것으로, 이 연쇄 고리를 관통하는 것은 몸이라는 실체와 이를 통해 경험하는 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컨의 회화를 설명하는 들뢰즈의 기술은 김인배에게도 참이다.2)

 김인배의 작업에서 감각은 오감으로 체험하는 어떤 성질뿐 아니라 힘이나 에너지가 몸을 거치며 생성되는 상태도 포함한다. <델러 혼 데이니>(2007)는 덩어리의 질감으로 감각을 전달하는 탁월한 예다. 작업은 동일한 형상에서 다르게 분화된 3가지의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우선 무표정에 해당하는 첫 번째 조각은 식별할 수 있는 형상이나 돌출된 부위 없이 표면이 곱게 갈려 부드럽게 정리되어 있다. 요철이 없는 단순한 덩어리의 양감은 아직 분화되지 않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물성으로 담아낸다. 연계된 다른 두 조각은 다른 상태로 전이가 일어난 모습이다. 얼굴의 면적이 무색하게 점으로 축소된 이목구비는 집중할 때 일어나는 심리적인 에너지의 수렴을 즉물적으로 형상화한다. 얼굴 위에 신경질적으로 연필선을 마구 갈긴 조각의 경우 분노나 짜증 같은 감정 에너지의 발산이 물화된 것일 테다. 이런 형상에서 형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이고 체험적으로 발현되는 가변적인 것이 된다. 

 힘의 작용에 따른 주관적 지각의 차이가 극적으로 드러난 작업 중 하나가 <라이징 패스트볼>(2010-2011)이다. 속구를 던지는 투수의 자세를 요약한 이 작업에서 물리적인 힘의 집중이나 심리적 긴장은 힘을 받는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 간의 비율을 왜곡시킨다. 던지는 자세가 가져오는 힘의 배분에 따라 신체의 각 부위는 부풀어지거나 움츠러든다. 상대적으로 필요 없는 얼굴은 세부가 생략되고, 힘이 덜 가는 팔꿈치 이하는 한 덩어리로 압축된다. 반면 온 몸의 하중을 지탱하는 왼쪽 다리는 한껏 강조되어 장딴지에서 무릎, 발목으로 이어지는 힘줄과 근육의 긴장이 팽팽하다. 그중 강조와 축소의 대비가 극명한 것은 양쪽 발의 크기다. 휘두르는 동작의 받침점으로 작용하는 왼쪽 발은 덩어리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닥을 꽉 누르는 발가락의 힘을 느낄 정도로 육중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오른쪽 발은 흔적만 남은 정도로 축소되어 오므라든다. 

 결국 김인배가 빚어내는 것은 감각이며, 그 감각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몸을 통과한 구체적인 살의 경험이다. 김인배의 인체상이 유독 성별이 분명하며 여성이 별로 없는 것은 경험의 주체인 작가가 남성인데서 기인한다. 작업이 관념적인 기억이 아닌 신체적 기억에 기반해 만들어지므로, 다른 몸의 감각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감각의 소환이 남성에 치우치는 것은 당연하다. 김인배의 작업에 성적인 코드가 종종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텐데, 성적 흥분의 고양과 하강을 표현한 <시계>(2009-2011)나 뒤집힌 여체가 도열한 <알람>(2009-2011) 같은 작업이 일례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피상적인 감각적 반응(이를 테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욕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작업의 본질을 비껴갈 수 있다. 김인배의 작업이 살의 즉물적 감각에서 출발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주목하는 것은 몸뚱어리 자체가 아니라 이를 관통하는 힘의 집중과 분산, 그 에너지의 흐름에 있기 때문이다. 실상 <시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에너지가 유발하는 강도의 변화고, <알람>이 알리는 것은 구상과 추상의 양가적 형태가 자아내는 차분하면서도 요란한 속성이다. ‘역동적이다’보다 ‘꿈틀대다’가 어울릴 만큼 몸의 직접성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표층 너머의 추상성을 지향하는 이중성은 김인배 작업 전반의 특징이자 커다란 매력이다. 

 

3. 리듬으로 진동하다. 

 김인배의 작업이 특정 감각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도나 힘, 에너지 같은 추상적인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은 그의 작업이 고정된 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되는 움직임의 도정에 있기 때문이다. 실로 그의 모든 작업은 ‘생성 중’이거나 ‘변태 중’이다.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여기와 저기를 모두 아우르는 다차원성은 개개의 조각이 고립된 사물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흘러가는 큰 흐름의 일부이기에 파생되는 특징이다. 김인배의 모든 작업은 ‘변화’를 직간접으로 내포하고 있는데, 이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은 단일한 조각 내에서, 연작들 사이에서, 전시 내부에서, 나아가 작업 전체를 넘나들며 운동 그 자체를 실행한다. 

 그 중에서도 움직임이라는 지향이 표면적으로 두드러졌던 때는 3회 개인전이다. 군상이 많아서 일차적인 운동의 형태가 직접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머레이의 연속동작사진을 3차원으로 번안한 듯한 <스핀>(2009-2011)은 두상을 던졌을 때 형성되는 물리적인 움직임을 구현한다. 약간의 굴곡이 있는 구체가 지닌 무게와 부피는 두상의 운동 양상을 결정한다. (이 역시 촉각적 감각이 양태로 발현된 것임은 물론이다.) 회전과 포물선 운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복합적인 움직임은 변화하는 머리 방향과 점점 벌어지는 두상간의 간격으로 실현된다. 이때 각 두상은 연결된 흐름이 순간 정지된 점에 해당하고, 점들은 연상에 의해 선으로 곧 회귀한다. <스핀>이 실생활에서 존재하는 물리적 상태 이동을 형상화했다면 <직각의 디스코>(2010)는 시공간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상태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오른쪽 팔을 왼편으로 넘겨 우측 어깨가 앞으로 젖혀진 형상은 90도씩 각도를 달리하며 네 번 반복된다.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연속 운동이 네 개의 순간으로 절단되어 병치된 셈이다. 

 시간의 여러 차원을 겹친 작업 중 의도가 제일 강했던 것은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2010)다. 제목이 암시하듯 병존할 수 없는 상태들이 한데 엉켜있는 이 선재(線材) 작업은 진행형의 상태 자체를 화석화한 듯하다. 권투, 덤블링, 그네타기, 칼싸움의 순간들은 때로는 순차적으로 때로는 불규칙하게 종합된다. 이때 선은 형상의 골격이나 외곽선이 아니라 동작, 즉 움직임을 구현한다. 마치 빨리 감기로 동작의 진행을 뭉쳐놓은 듯도 하고 되돌려 감기로 분할되기 이전의 요동치는 상태를 복구해놓은 듯도 한데, 여기서 움직임이라는 흐름의 변화는 소밀(疏密)을 반복하며 리듬을 형성한다.  

 하지만 움직임이 수반하는 리듬이 비단 운동을 직접 형상화한 작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이 점이 김인배의 모든 작업을 어떤 계기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분화되는 리듬의 약동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힘의 강도가 달라지며 형성되는 리듬은 형태 내의 리듬이기도 하고, 형상과 형상 사이의 리듬이기도 하며, 매체와 매체, 차원과 차원 간의 리듬이기도 하다. 군상일 경우 리듬의 재현은 상과 상의 관계에서 생성되므로 비가시적인 운동을 구현한 경우에도 비교적 명료하다. <델러 혼 데이니>의 리듬은 감정 에너지가 변화됨에 따라 조였다 풀리며 달라지는 상태의 전이에서 도출된다. 감정 에너지의 흐름은 본질적으로 연속된 것이지만 외부적 자극이 개입됨에 따라 무표정에서 집중으로, 집중에서 분노로 발현의 양상이 변화한다. 이 운동에 의도된 방향은 없지만 리듬은 분화와 미분화를 반복하는 움직임 속에 존재한다. 한편 단독상의 경우 리듬은 형상에 내재적이다. <라이징 패스트볼>에서 리듬은 물리적 힘의 집약에 따라 달라지는 비율을 타고 흐른다. 시각적으로 체현된 생략과 강조가 리듬인 것이다. <샤모랄타 샤모랏타>(2007)의 경우 작용의 원천은 정신 에너지나 형태의 변화가 곧 상태의 변화이자 리듬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덩어리져있던 어떤 생각이 끊어지지 않아 뒤통수 뒤에서 계속 잡아당기고 있는 상태를 구현한 이 작업에서 리듬은 둥그런 머리에서 길게 뽑히는 형상의 선에도, 드로잉에서 조각으로 이어진 매체의 전환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단독상이라 할지라도 김인배의 조각은 본성상 고정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투수의 자세에서 순간순간을 동결시킨 <라이징 패스트볼>은 잠시 정지되었을 뿐 또 다른 상태로의 전환을 이미 함축한다. 연속된 힘의 전개에서 특정 시점에 개입되는 감각에 따라 발현 양상이 달라질 뿐 근저에 흐르는 파동은 분절되지 않은 까닭이다. 결정된 상태 밑에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가 흐르고, 결정되었다하더라도 잠정적이다. 김인배의 조각이 차원의 경계를 넘는 데에는 변화라는 진동이 작용한다. 

 

0. 차원의 영점에 서다. 

 5번째 개인전이자 한국에서의 4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는 외견상 전작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매끈하게 마감된 표면에 움직임이 직접적이었던 3번째 개인전과 달리 작업은 대체로 정적이며 다듬지 않은 거친 질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한 과거에는 구상이라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식별할 수 있었던 반면 이번에 선보인 신작들은 인체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훨씬 추상적이다. 조상들의 크기나 표면 처리도 훨씬 다양해졌다. 등신대를 훌쩍 넘는 좌상과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크기의 입상이 한 군(群)으로 전시되고, 사포질을 한 정도에 따라 동일한 FRP의 마감도가 달라진다. 재료 또한 FRP 외에 황동이 포함되어 백색, 흑색, 회색, 황색이 공존하는 시각적으로 다채로운 풍경이 연출된다. 

 그러나 개념적 측면에서는 이번 전시 역시 김인배가 추구하는 지향들의 연속이다. 차원의 공존이나 감각의 중시, 척도의 상대성, 경계를 넘나들며 발생하는 리듬과 운동은 이번 전시에서도 여전히 표면 아래를 유유히 흐른다. 좁게는 개별 작품마다 넓게는 작업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특성들은 김인배 작업 심층에서 진동하며 매 작품마다, 전시마다 다르게 분절하며 나타난다. 마치 어떤 잠재태가 지속되면서 현실의 감각이라는 구체적 계기와 마주칠 때마다 매번 형을 달리하며 분화된다고 해야 할까. (이 접속은 작가가 경험한 신체적 감각기억이 형상 제작이라는 계기를 통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인배가 그간 만들어온 전시들은 선형적 진화의 방식을 따르는 게 아니라, 동일한 성질들이 조합되는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복되는 성질들은 경우를 달리하며 매번 다른 양상으로 돌출된다. 1,2회전이 차원의 문제를 강하게 표면화했다면, 3회전은 운동성의 문제가 도드라졌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현된 현실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근원적으로 조형의 기본 요소를 탐색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차원의 영점으로 돌아갔다고도 할 수 있는데, 드로잉이나 조각 같은 매체의 경계를 문제시하던 데서 나아가 점, 선, 면이라는 조형의 본질로 돌아간 것이다. 김인배는 입체를 점, 선, 면의 조합으로 본다. 점이 모여서 선이 되고, 선이 면을 이루며, 면이 합쳐져 부피를 이루는 원리는 거꾸로도 적용할 수 있다. 입체 안에 면들이 존재하고, 면과 면의 모서리에서 선이 형성되며, 선이나 면의 종단에 점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입체 안에는 점, 선, 면이 공존하게 된다. 작가는 이 같은 조형성의 원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인체에 기하학적 요소를 가미했다. 이번 전시가 이전에 비해 추상적으로 보인다면 날이 서 있는 형태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면은 없다>(2012)에서 얼굴의 정면은 사라져 하나의 선이 된다. <조립>(2013)은 아예 옆면만 존재하며 그 앞, 뒤, 위에 세 개의 선이 생긴다. 두상의 곡면이 사라진 <핀휴>(2013)는 삼각형의 옆면 네 개가 모여 6개의 선과 3개의 점을 형성한다. 한편 <겐다로크>(2013)의 경우 얼굴은 각뿔 두 개로 갈라지는데, 곡면과 평면은 첨점으로 끝을 맺는다. 얼굴이 가로로 뽑힌 <섬광>(2013)은 정면에서는 선이고 양끝에서는 점이다. 점, 선, 면의 공존은 김인배가 늘 천착하는 주제인 차원의 비구분에 속한다. 미분화된 덩어리의 특정 지점에 힘이 집중되면 형태가 응축되면서 각이 생기고, 입체는 선이나 점으로 뽑힌다. 점과 선, 면의 경계가 사라지고 대신 형성되는 것은 복수다발적인 상호 순환 고리다. 이 복합적인 관계망에서 분리된 점, 선, 면은 제거된다. 

 한편 몸과 결부된 감각성은 신작에서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물론, 추상으로 이행하는 경우도 인간의 신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몸으로 느낀 구체적인 감각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자세나 근육의 모양 같은 요소는 신작들에서도 여전히 촉각적 구체성을 유지한다. <섬광>에서 남성의 커다란 어깨가 주는 위압감이나 비스듬히 기댄 자세 때문에 등이 활처럼 휘는 모양은 실제로 몸을 참고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작업의 방점은 오감으로 체험한 성질이 아니라 변형이나 차원 같은 관념적인 측면에 있다. 그런 까닭에 몸으로 체험한 감각을 직접 전달하는 경향은 덜한 편이다. 대신 강화된 것은 재료와 마감에 따른 조형물의 질감이다. 이번 신작은 이전에 비해 유독 다양한 표면 처리가 눈에 띈다. 특히 <섬광>과 <읽어라>(2013)는 깎거나 덧붙여 만드는 조소의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 달리 붓으로 발라 형태를 만들었다. 그래서 붓질의 흔적이 남아 덜 다듬어진 거친 질감을 자아낸다. 반면 함께 배치되는 <겐다로크>나 <정면은 없다> 같은 경우 FRP를 어느 수준 이상으로 갈아서 매끄러운 표면을 만든다. 재미난 점은 사포질의 정도에 따라 곱기 뿐 아니라 재료의 색도 변한다는 것이다. <정면은 없다>의 밑받침은 흑색인 반면 두상은 회색인데, 차이라면 동일한 상태에서 밑받침에 한 단계 더 사포질을 한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리듬과 운동성의 문제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요소다. 표면적인 인상과 내재된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전술했듯 이번 신작들은 가시적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정적이다. 하지만 외피를 떠내면 그 밑에는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움직임이 있다. 조용한 표면 밑에 그야말로 강렬한 진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모든 면에서 한 상태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경향을 강하게 표출한다. 작업은 온 몸으로 변형 중이다. 형태와 재료, 색, 제작방식, 크기, 마감을 넘어 디스플레이까지, 변화는 어디에나 뚜렷하다. 그 중 <무거운 빛은 가볍다>(2014) 연작은 전 층위에 걸친 변형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업이다. 세 점으로 이루어진 연작의 첫 번째 작업은 이전 전시의 출품작이던 <너의 눈을 흔들어 마음에 바쳐라>(2010)가 원형이다. 물리적 충격이나 정신적 긴장 때문에 이가 틀어지는 감각을 형상화한 원본은 그 자체로 변형을 담고 있다. <무거운 빛은 가볍다-왕관>은 여기에 새로운 작업을 문자 그대로 덧씌운다. 이미 변형 중이던 작업에 또 다른 변형을 부가한 것이다. 한편 각기 기둥과 폐허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의 다른 두 작업은 첫 번째 작업이 다른 양상으로 분화된 것이다. 이들은 덩어리에서 형상이 솟아나거나 무너지는 과정 중에 있다. 이들 연작은 동일한 형상이 분화의 정도에 따라 끝없이 달라지는 운동성을 가시화한다. 이때 변화의 리듬은 두 개의 다른 시간의 접합에도, 세 개의 다른 형상의 순환에도 깃들어 있다. 

 리듬은 구상과 추상, 더 분화된 쪽과 덜 분화된 쪽, 한 작업과 다른 작업 사이를 가로지르며 전시 전체에 넘실댄다. <당기지 마시오>(2014)에서 어긋나는 몸과 손의 비례에도, 손을 분리한 <섬광>의 디스플레이에도 리듬은 현존한다. 과거에 주로 작품 내부에 머물던 리듬은 이제 공간의 리듬으로 확장된다. 크기나 재질, 색을 달리하는 작품들이 함께 놓이면서 작업 사이에 긴장이 형성되고, 이는 곧 공간의 강약으로 이어진다. 눈을 감고 있으나 마음은 격렬히 요동치는 상태, 묶인 상태에서의 발작. 그것이 이번 전시가 정적 속 폭풍인 이유다. 표면은 고요하나 억눌린 파동이 물 밑에서 들끓는다. 그 진동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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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앙리 베르그손(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347-348쪽.

2) "나는 감각 속에서 되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다. 관객으로서 나, 나는 그림 안에 들어감으로써만 감각을 느낀다. 그럼으로써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질 들뢰즈(하태환 역),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12, 47-48쪽.